
프랭클린 원정대
1845년 영국 해군이 북서항로를 뚫으려 보낸 탐험선 두 척이 북극 얼음에 갇히고 대원 129명 전원이 사라졌다. 한 세기 반의 미스터리는 2014·2016년 난파선 발견으로 일부 풀렸지만, 무엇이 그들을 죽였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개요
존 프랭클린 경이 이끈 이 원정은 19세기 영국이 가장 자신했던 항해 중 하나였다. 최신 증기기관과 철판으로 보강한 선체, 3년치 통조림 식량—당대 기술의 정점이 북극의 얼음 앞에서 통째로 침묵했다. 이후 영국과 미국은 수십 차례 수색대를 보냈고, 발견된 것은 무덤 몇 기와 흩어진 유골, 그리고 단 한 장의 쪽지뿐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잘 준비된 원정대 전원을 죽였는가는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풀리지 않는 질문이 되었다.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던 이 사건은 2014년과 2016년 난파선 두 척이 캐나다 북극 해저에서 발견되며 일부 규명되었다. 두 배가 어디서 가라앉았는지, 대원들이 어떤 경로로 죽어갔는지는 상당 부분 드러났다. 그러나 사망의 정확한 원인, 마지막 몇 주의 행적, 끝내 펼쳐진 참극의 전모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배경 — 북서항로와 프랭클린
북서항로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북극해의 항로로, 수백 년간 유럽 항해자들의 집념의 대상이었다. 19세기 중반 영국 해군은 이 마지막 미답 구간을 자국이 완성하려 했고, 그 임무를 노련한 북극 탐험가 존 프랭클린 경(Sir John Franklin)에게 맡겼다. 당시 59세였던 그는 과거 북극 육상 탐사 경험이 있었으나, 이미 적지 않은 나이였다.
원정선은 둘 다 한때 군함이던 견고한 배를 개조한 것이었다. HMS 에레버스(약 378톤)와 HMS 테러(약 331톤)는 기관차를 개조한 증기기관과 스크루 프로펠러, 철판으로 보강한 선수, 내부 증기 난방까지 갖춘 당대 최첨단 빙해 항해선이었다. 식량은 통조림으로 약 3년치를 실었다. 당시로서는 어떤 위험도 견딜 수 있어 보이는 채비였고, 이 과신이 훗날 비극의 배경이 된다.
타임라인
- 1845-05-19그린히드에서 에레버스·테러 출항 (대원 129명)
- 1845-07 말배핀만에서 포경선들이 마지막으로 목격 — 이후 소식 두절
- 1845~1846 겨울비치섬에서 월동, 대원 3명 사망(토링턴·하트넬·브레인)
- 1846-09-12킹윌리엄섬 인근 빅토리아 해협에서 얼음에 갇힘
- 1847-06-11존 프랭클린 경 사망
- 1848-04-221년 반 만에 두 배를 버림. 105명 생존, 크로지어 지휘로 육상 행군 시작
- 1848-04-25빅토리 포인트 기록 작성 — 장교 9명·대원 15명 사망 명시
- 1854존 레가 이누이트 증언 입수 — 아사·식인 정황 보고
- 1859-05킹윌리엄섬 돌무지에서 빅토리 포인트 기록 발견
- 2014-09-07HMS 에레버스 난파선 발견 (윌멋·크램튼만)
- 2016-09-12HMS 테러 난파선 발견 (테러만)
단서와 발견 / 확인된 사실
남은 단서는 적었으나, 그 하나하나가 비극의 윤곽을 그려냈다.
특히 식인의 흔적은 절제해 사실로 다룰 필요가 있다. 일부 유골에서는 칼로 살을 발라낸 듯한 절단 자국이 확인되었고, 2015년 한 연구는 35점가량의 뼈에서 골수 지방을 뽑아내기 위한 파쇄와 가열('포트 폴리싱') 흔적을 보고했다. 이는 굶주린 대원들이 마지막 국면에서 식인에 이르렀다는 19세기 이누이트 증언과 일치한다.
핵심 의문
확인된 사실들이 답하지 못하는 핵심 질문은 하나다. 무엇이 잘 준비된 129명 전원을 죽였는가. 3년치 식량을 싣고 최신 선박으로 떠난 원정대가, 얼음에 갇힌 지 1년 반 만에 어떻게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는가.
빅토리 포인트 기록은 1848년 4월까지 24명이 죽었다고 적었다—얼음에 갇힌 첫 1년 반 사이 사망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는 뜻이다. 통상의 빙해 월동에서는 이만한 사망이 흔치 않다. 남은 105명이 배를 버리고 수백 km의 육상 행군을 택한 것은, 배에 머무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 행군은 거의 전원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추위였는가, 굶주림이었는가, 아니면 그들의 몸을 먼저 무너뜨린 다른 무엇이 있었는가.
가설
오늘날 학계의 대체적 견해는, 어느 한 원인이 아니라 혹한·기아·괴혈병에 납중독과 질병이 겹친 누적적 붕괴가 원정대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각 요인은 단독으로는 전원 사망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빙해 고립이 길어지며 이들이 동시에 작용했다는 데에는 폭넓은 공감대가 있다.
현재 상태 / 남은 의문
2014·2016년 두 난파선의 발견으로 사건은 부분적으로 규명되었다. 두 배가 가라앉은 위치가 확인되었고, 이누이트 구전이 줄곧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난파선의 보존 상태가 좋아 파크스 캐나다는 이후 잠수 조사를 통해 선실과 유물을 회수하고 있으며, 이는 마지막 몇 주의 행적을 새로 밝혀낼 단서로 기대된다.
이 발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누이트 지식의 역할이다. 30여 년간 장로들의 구전을 수집한 이누이트 연구자 루이 카무칵(Louie Kamookak)을 비롯한 이누이트의 구술 전승이 수색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이끌었다. 한때 신빙성을 의심받던 19세기 이누이트 증언은 거의 모든 핵심에서 사실로 확인되었고, 오늘날 키티크메오트 이누이트는 유적의 관리와 조사에 동등한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은 의문은 남는다.
- 얼음에 갇힌 첫 1년 반 동안 사망률이 그토록 높았던 정확한 원인
- 105명이 배를 버리고 행군을 택한 결정의 구체적 경위
- 두 배의 마지막 항적—특히 한 척이 남쪽으로 떠내려간 과정
- 납중독·질병이 사망에 실제로 기여한 정도
프랭클린 원정대는 운명과 난파선의 위치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풀린 사건이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129명 전원이 죽었는가라는 핵심은 여전히 단편적으로만 답해진 채 남아 있다.
출처
- Franklin's lost expedition — Wikipedia
- Wrecks of HMS Erebus and HMS Terror National Historic Site — Parks Canada
- How Inuit oral history helped locate Erebus and Terror — Royal Museums Greenwich
- Franklin expedition — Encyclopaedia Britannica
- Evidence for End-Stage Cannibalism on Sir John Franklin's Last Expedition (Stenton et al., 2015)
- 10 years after Franklin shipwreck site was located, Inuit involvement is still strong — CBC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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