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터 판사 실종
1930년 8월, 뉴욕주 대법원 판사 조지프 포스 크레이터가 사무실 서류를 정리하고 거액을 인출한 직후 맨해튼의 한 식당에서 나와 사라졌다. 정치 부패의 그림자 속에서 영영 발견되지 않아 '가장 많이 실종된 남자'라는 관용구를 남겼다.
개요
사라지던 날 크레이터는 사무실에서 서류를 정리·소각하고, 서기를 시켜 수표 두 장을 현금화했으며, 여러 묶음의 서류를 자기 아파트로 옮겼다. 이 정황과, 그의 임명을 둘러싼 정치 부패 의혹이 맞물리면서 사건은 단순 실종을 넘어선 미스터리가 되었다. 그는 끝내 발견되지 않아 "가장 많이 실종된 남자(the most missingest man)"로 불렸고, "크레이터 판사처럼 사라지다(to pull a Judge Crater)"는 표현이 대중문화 관용구로 남았다.
배경 — 판사와 태머니홀
크레이터는 1889년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턴에서 태어났다. 라파예트 칼리지와 컬럼비아 대학교를 거쳐 변호사가 되었고, 뉴욕 민주당 정치 기구인 태머니홀(Tammany Hall) 계열의 케이유가 민주당 클럽에서 지구당 지도자 마틴 J. 힐리(Martin J. Healy) 밑에서 선거 실무와 선거법 사건을 다루며 정치적 연줄을 쌓았다.
문제는 이 시기 뉴욕 정가가 매관매직(賣官賣職) 의혹에 휩싸여 있었다는 점이다. 판사직이 거액에 거래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부패를 캐기 위한 시버리 위원회(Seabury Commission) 조사가 1930년 중반에 시작되고 있었다. 크레이터 역시 1927년 조지 이월드(George Ewald)의 판사 임명과 관련해 의심을 사는 위치에 있었다.
타임라인
- 1930-04-08주지사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크레이터를 뉴욕주 대법원 판사로 임명.
- 1930-08-05메인주에서 휴가 중이던 크레이터가 맨해튼 아파트로 돌아옴. 아내에게 8월 9일 생일 전 돌아오겠다고 약속.
- 1930-08-06사무실에서 약 두 시간 서류를 정리·소각. 서기 조지프 마라가 수표 두 장(약 5,150달러)을 현금화. 저녁 빌리 하스 촙하우스에서 식사 후 식당을 나선 뒤 행방불명.
- 1930-08-25법원 개정일에 크레이터가 출석하지 않자 동료 판사들이 비공식 조사를 시작.
- 1930-09-03경찰에 정식 신고. 실종이 신문 1면 기사로 보도되며 대대적 수사 시작.
- 1930-10대배심 소집. 95명 증언·975쪽 기록에도 '생사 여부를 단정할 증거 불충분' 결론.
- 1931-01-20아내가 아파트 서랍에서 수표·주식·채권과 메모를 발견. 경찰 수색 때는 없던 것들.
- 1939-06-06아내의 청원으로 크레이터를 법적 사망 선고.
- 1979사건이 공식 종결됨.
- 2005-08-19사망한 여성 스텔라 페루치굿이 남긴 메모 공개. 경찰관 등이 크레이터를 살해해 코니아일랜드에 묻었다는 미확인 주장.
사라지기 전날 — 서류와 현금
8월 5일 크레이터는 메인주 휴양지에서 맨해튼 아파트로 돌아왔고, 아내에게는 곧 합류하겠다고 했다. 이튿날인 8월 6일 그의 행동은 평소와 달랐다.
저녁에는 빌리 하스 촙하우스(웨스트 45번가 332번지)에서 변호사 윌리엄 클라인, 쇼걸 샐리 루 리츠(Sally Lou Ritz)와 식사했다. 식사를 마친 시각은 대략 오후 9시경으로 전해진다. 이후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서류 가방의 행방은 끝내 묘연했다. 수사 과정에서 그의 안전금고(safe deposit box)는 비어 있었고, 옮겨졌다는 서류 가방 두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와 소문
크레이터의 실종은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메인에 있던 아내도, 동료들도 즉시 신고하지 않았고, 동료 판사들이 8월 25일 그의 결근을 이상히 여겨 비공식 조사를 시작한 뒤에야 움직임이 일었다. 9월 3일 경찰이 통보를 받으면서 사건은 전국적 화제가 되었다.
식당을 나설 때의 정황조차 엇갈렸다. 클라인은 처음엔 크레이터가 오후 9시 30분경 식당 앞에서 택시를 타고 45번가를 서쪽으로 갔다고 증언했고 리츠도 이를 뒷받침했으나, 두 사람 모두 나중에 진술을 바꿔 그가 택시 대신 거리를 걸어갔다고 말했다.
1931년 1월, 아내가 아파트 서랍에서 경찰 수색 때는 없던 수표·주식·채권과 메모를 발견하면서 새 단서가 나오는 듯했으나, 이 역시 결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핵심 의문
- 왜 사라지기 직전 거액을 현금화하고 투자를 청산했으며, 서류를 파기하고 가방에 담아 옮겼는가. 도주를 준비한 정황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였는가.
- 옮겨졌다는 서류 가방 두 개와 안전금고의 내용물은 어디로 갔는가.
- 식당 앞에서 택시를 탔는가, 걸어갔는가. 동석자들의 진술은 왜 바뀌었는가.
- 1931년 1월 아내가 발견한 서랍 속 서류는 누가, 언제 그곳에 두었는가.
- 인출한 자금이 매관 사례금이었다면, 그것이 그의 실종과 직접 연결되는가.
가설
현재 상태 / 출처
크레이터는 1939년 6월 6일 아내의 청원으로 법적 사망 선고를 받았고, 사건 파일은 1979년 공식 종결됐다. 1만 6,000건에 이르는 제보, 대배심, 수십 년간의 추적에도 그의 생사나 시신, 옮겨진 서류 가방 중 어느 것도 확인되지 않았다. 사건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해결 실종으로 남아 있으며, "가장 많이 실종된 남자"라는 별칭과 함께 한 시대의 정치 부패와 미스터리를 상징하는 사례로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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