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해결미제사건

아시카가 사건

1990년 일본 도치기현에서 네 살 여아가 희생된 사건으로, 한 남성이 초기 DNA 감정과 자백을 근거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그러나 약 17년 6개월 뒤 최신 DNA 재감정이 그의 무죄를 증명하며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 진범은 끝내 특정되지 않았다.

1990년 (재심 무죄 2010)일본 도치기현 아시카가11분 분량

개요

아시카가 사건은 일본 형사사법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DNA가 사람을 가두었다가, 다시 DNA가 그를 풀어준 드문 사례라는 점이다. 1990년대 초의 미숙한 감정 기술이 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했고, 같은 증거물에 대한 20여 년 뒤의 정밀 감정이 그 결론을 뒤집었다. 둘째, 강압적 취조가 만들어낸 허위 자백의 위험과, '과학적 증거'로 불리는 것조차 오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본 사회에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이 문서는 어린 피해자가 있는 사건인 만큼 가해 행위의 구체적 묘사를 일절 배제하고, 확인된 사실에 한정한다. 초점은 사건 자체의 잔혹함이 아니라, DNA 재감정으로 오심을 바로잡은 전환점과 그것이 일본 사법개혁에 남긴 의미에 둔다.

배경

1990년 5월 12일, 아시카가시의 한 파친코 가게 주차장 일대에서 놀던 네 살 여아가 사라졌다. 이튿날인 5월 13일, 아이는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와타라세강 강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작은 지방 도시에서 일어난 어린아이의 죽음은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수사는 빠르게 확대됐다.

수사는 오래 난항을 겪었다. 결정적 물증이 없던 상황에서 경찰은 현장에서 확보한 체액이 묻은 증거물(피해 아동의 의류)에 주목했고, 당시 일본 경찰이 막 실용화하기 시작한 DNA형 감정에 기대를 걸었다. 1991년 12월 2일, 경찰은 인근에 거주하던 유치원 통원버스 운전기사 스가야 도시카즈를 외설 목적 유괴 및 살인 혐의로 체포했다.

타임라인

  1. 1990-05-12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에서 네 살 여아 마쓰다 마미 행방불명
  2. 1990-05-13
    와타라세강 강변에서 피해 아동 발견 — 수사 개시
  3. 1991-12-02
    스가야 도시카즈 체포 (초기 DNA 감정 MCT118법 + 자백 근거)
  4. 1993-07-07
    우쓰노미야 지방재판소, 무기징역 선고 (1심)
  5. 1996-05-09
    도쿄 고등재판소, 항소 기각 (무기징역 유지)
  6. 2000-07-17
    최고재판소 상고 기각 — 무기징역 확정
  7. 2002-12-25
    스가야, 재심 청구
  8. 2007
    기자 시미즈 기요시, 인접 사건들과의 연관성·오심 가능성 추적 보도
  9. 2009-02~05
    최신 STR법으로 DNA 재감정 실시 — 현장 증거와 스가야 DNA '불일치' 판명
  10. 2009-06-04
    도쿄 고검, 형 집행 정지 — 스가야 석방 (약 17년 6개월 만)
  11. 2009-06-23
    도쿄 고등재판소, 재심 개시 결정
  12. 2009-10-05
    검찰, 우쓰노미야 지검에서 스가야에게 공식 사과
  13. 2009-10-21
    우쓰노미야 지방재판소에서 재심 공판 시작 — 검찰도 무죄 논고
  14. 2010-03-26
    우쓰노미야 지방재판소, 재심 무죄 판결 확정
  15. 2010-04
    경찰청, 아시카가 사건 수사 문제점 검증 보고서 공표

확인된 사실

여기서 사건의 핵심 모순이 드러난다. 스가야를 18년 가까이 가둔 근거였던 'DNA가 일치한다'는 판단이, 같은 증거물에 대한 더 정밀한 분석 앞에서 정반대의 결론으로 뒤집힌 것이다. 동일한 물적 증거가 기술 수준에 따라 한 사람을 범인으로도, 무고한 사람으로도 만들 수 있음을 이 사건은 단적으로 보여준다.

핵심 전환점 — DNA 재감정과 재심 무죄

스가야의 무기징역은 2000년 7월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됐다. 통상적이라면 사건은 그대로 종결됐을 것이다. 전환의 실마리를 만든 것은 두 갈래의 힘이었다.

첫째는 재심 청구와 변호인단의 끈질긴 요구였다. 스가야 측은 2002년 12월 재심을 청구하며, 사건 당시의 미숙한 DNA 감정을 현대 기술로 다시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는 탐사보도 기자 시미즈 기요시(清水潔)의 추적이었다. 그는 2007년 무렵부터 도치기·군마현 일대에서 일어난 일련의 여아 실종·살해 사건들이 서로 닮은 점에 주목했고, 그 연장선에서 아시카가 사건의 유죄 판단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보도는 존재하지 않는 증거와 부실한 DNA 감정, 묵살된 목격 정황 등 수사의 허점을 드러내며 여론을 움직였다.

석방 당시 스가야가 갇혀 있던 기간은 약 17년 6개월에 달했다. 그는 무죄 확정 이후 부당한 구금에 대한 형사보상을 받았는데, 일본 보도에 따르면 그 금액은 약 8,000만 엔으로 전해진다. 무죄 판결 뒤에는 경찰청도 2010년 4월, 아시카가 사건 수사의 문제점을 자체 검증한 보고서를 공표했다.

의미

특히 취조 녹화 제도는 아시카가 사건이 남긴 가장 구체적인 제도적 유산으로 꼽힌다. 2011년, 아시카가 사건을 비롯해 시부시 사건·히미 사건·후카와 사건·우편부정 사건 등 잇따라 드러난 오심 사건을 배경으로 법제심의회에 '새 시대의 형사사법제도 특별부회'가 설치됐다. 이들 사건이 공통적으로 부당한 취조와 그로 인한 허위 진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그 논의의 결과로, 재판원재판 대상 사건과 검찰 독자수사 사건에서 체포·구금된 피의자의 취조를 녹음·녹화하도록 의무화하는 제도가 마련됐다. 한 사건의 오심이 입법으로 이어진 드문 사례다.

또한 이 사건은 사형 제도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만약 더 무거운 형이 선고되고 집행됐다면, 2009년의 재감정으로 무죄를 입증할 기회조차 영영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심이 회복 불가능한 형태로 굳어질 위험을 아시카가 사건은 실제 사례로 보여주었다.

현재 상태 / 남은 의문

스가야 도시카즈는 무죄 확정 이후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가 잃어버린 17년 6개월은 형사보상과 국가의 사과로 메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결백은 법적으로 회복됐다. 그러나 사건 자체는 해결되지 않았다.

진범 미특정에는 공소시효의 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아시카가 사건과 인접 연쇄 사건 대부분은 이미 시효가 만료돼, 설령 진범이 밝혀진다 해도 처벌이 불가능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 한 무고한 사람의 누명은 벗겨졌지만,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은 끝내 법의 손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 남은 셈이다.

아시카가 사건이 '부분해결'로 분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심이라는 거대한 잘못은 바로잡혔으나, 사건의 본질인 누가 범인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은 DNA가 사람을 가두기도, 풀어주기도 한다는 양면을 동시에 보여주었고, 동시에 미제사건이 시간이 아니라 방법과 제도의 문제일 수 있음을 — 그리고 잘못된 수사가 남긴 공백이 얼마나 오래 메워지지 않는지를 함께 증언한다.

출처

  1. Ashikaga murder case — Wikipedia (English)
  2. 足利事件 — Wikipedia(日本語)
  3. North Kanto Serial Young Girl Kidnapping and Murder Case — Wikipedia (English)
  4. Implicated by DNA, Exonerated by DNA – The Ashikaga Case — Wrongful Convictions Blog
  5. 足利事件における警察捜査の問題点等について(概要)— 警察庁(2010)
  6. 足利事件 — 日本弁護士連合会(재심지원)
  7. 判決紹介 足利事件再審開始決定[東京高決平成21.6.23] — CiNii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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