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긴 사건
1948년 도쿄 제국은행 지점에서 방역 공무원을 사칭한 남성이 행원 16명에게 독극물을 먹여 12명이 숨졌다. 화가 히라사와 사다미치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자백을 번복했고, 사형 미집행 상태로 옥중 사망해 진범 논쟁은 미궁에 남았다.
개요
데이긴 사건은 일본 전후(戰後) 범죄사에서 가장 무거운 오심 논쟁을 남긴 사건으로 꼽힌다. 12명이 한자리에서 독살된 잔혹한 결과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라는 물음에는 아직 합의된 답이 없다. 유죄가 확정된 인물은 끝내 처형되지 않은 채 죽었고, 그가 진범이 아니라면 진짜 범인은 영영 처벌받지 않은 셈이다.
이 문서는 확인된 사실(범행 규모·수법·재판 경위)과, 그 위에 쌓인 의혹·가설을 엄격히 구분해 정리한다. 히라사와의 유죄 여부, 군 독극물 전문가 진범설 등은 모두 '설(說)'과 '의혹'의 영역이며, 어느 쪽도 최종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둔다.
배경
1948년의 일본은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점령 통치 아래 있었다. 도시는 공습의 잔해와 식량난, 전염병의 위협 속에 놓여 있었고, 이질·발진티푸스 같은 감염병 예방을 명목으로 한 공중보건 활동이 실제로 일상적으로 이뤄지던 시기였다. 보건 당국의 완장을 차고 "예방약을 먹으라"는 남성의 지시가 그날 은행원들에게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 배경에는 이런 시대 상황이 있었다.
표적이 된 제국은행은 당시 일본의 주요 시중은행 중 하나였고, 사건 현장인 시나마치 지점은 도쿄 변두리의 소규모 점포였다. 범인은 영업이 막 끝나 외부인의 출입이 끊긴 시간대를 노렸고, '집단 이질 발생'이라는, 당시로서는 그럴듯한 명분과 관(官)의 권위를 빌려 다수를 한꺼번에 무력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타임라인
- 1948-01-26오후 3시경, 방역반 완장·후생성 관계자를 사칭한 남성이 제국은행 시나마치 지점에서 16명에게 독극물 복용. 현금 약 16만 엔과 수표 강탈
- 1948-01-26현장에서 다수 사망, 일부는 병원 이송 후 사망. 최종 사망자 12명, 생존자 4명
- 1948-08-21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화가 히라사와 사다미치 체포 — 출처 불명의 예금, 알리바이 부재 등이 근거
- 1948-09~10취조 중 히라사와 자백(이후 강압·고문 의혹 제기됨)
- 1948-12-10공판에서 히라사와가 자백을 번복하고 무죄 주장 — 이후 일관되게 무죄 호소
- 1950-07-241심, 히라사와에게 사형 선고
- 1951-09-292심, 항소 기각
- 1955-04-06최고재판소 상고 기각, 사형 확정
- 1955~1987사형 확정 후 약 32년간 미집행 수감. 다수의 재심 청구가 모두 기각됨
- 1987-05-10히라사와, 도쿄 하치오지 의료교도소에서 폐렴으로 사망(향년 95세). 사형 미집행
사건과 재판 / 확인된 사실
범행
강탈 금액은 자료마다 현금 약 16만 엔(정밀하게는 16만 4,410엔)과 야스다은행 이타바시 지점 발행 수표 1만 7,450엔어치로 기록된다. 범인이 더 많은 현금을 남겨 두고 떠난 점은, 이 사건의 동기와 범인상을 둘러싼 의문의 한 축으로 남았다.
체포와 재판
생존자 식별에도 한계가 있었다. 범인을 직접 목격한 관계자가 여럿이었음에도, 히라사와를 범인으로 분명히 지목한 생존 증인은 소수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직접적인 물증—독극물 자체나 범행 도구가 히라사와와 연결되는 증거—은 확보되지 않았고, 유죄 인정은 사실상 자백과 정황 증거에 크게 의존했다.
핵심 의문 — 히라사와는 진범인가
데이긴 사건의 핵심은 단 하나의 물음으로 요약된다. 히라사와 사다미치는 정말로 12명을 독살한 범인인가, 아니면 진범이 따로 있는 오심의 희생자인가.
유죄를 의심하는 쪽이 드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자백의 신빙성이다. 히라사와의 자백은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번복됐고, 그는 이후 32년간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자백이 장시간의 강압적 취조, 나아가 고문에 가까운 압박 속에서 끌어내어진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자백 외에 그를 현장과 직접 연결하는 결정적 물증이 없었다는 점은 이 주장의 무게를 더한다.
둘째, 독극물 전문성의 문제다. 범인은 청산계 독극물을, 즉사를 피하고 시차를 두어 작용하도록 다루며 다수를 정확히 중독시켰다. 이는 상당한 화학·독물 지식과 취급 경험을 시사한다. 화가였던 히라사와가 그런 전문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진범이 군의 독극물 전문가일 가능성으로 이어졌다.
셋째, 출처 불명 예금에 대한 다른 설명이다. 검찰은 그의 계좌에 들어온 거액을 강탈한 돈으로 봤지만, 히라사와 측은 그 돈의 출처를 별도로 설명했다(춘화 등 그림 거래로 얻은 수입이라는 주장이 거론된다). 다만 이 설명은 끝내 명확히 입증되지 못했고, 동시에 그 돈이 강도 자금이라는 점도 직접 증명되지는 않았다.
가설
아래 가설들은 모두 추정 또는 설(說)이며,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진범의 정체와 히라사와의 유무죄는 끝내 사법적으로 규명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
히라사와의 사망으로 사형은 자연히 집행 불능이 됐지만, 사건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사형수가 죽으면 본인에 대한 재심은 형식상 종료되나, 유족과 지지자들은 명예 회복을 위한 재심 청구를 이어 왔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면서 사건을 직접 기억하는 관계자와 운동 참여자들이 고령화·세상을 떠나, 진상 규명의 동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남은 의문은 무겁다. 히라사와의 자백은 진실이었나, 아니면 압박이 만든 허위였나. 화가에게 다수를 정확히 독살할 전문성이 있었나. 범인이 군 독극물 전문가였다면 그는 왜 끝내 특정되지 않았나. 독극물의 정체조차 합의되지 않은 채, 12명의 죽음과 한 사람의 32년 수감만이 또렷한 사실로 남았다.
데이긴 사건은 자백에 의존한 유죄 인정의 위험, 점령기의 정치적 그림자, 군 독극물이라는 어두운 유산이 한데 얽힌 사건으로서 일본 사회의 오랜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진범이 히라사와였는지, 아니면 끝내 처벌받지 않은 누군가였는지—그 답은 지금도 미규명 상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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